밤새 내린 비에 스산한 기운이 감도는 아침. 날씨는 어찌나 추운지, 벌벌 떨면서 아침 식사를 했다. 팬케익과 과일로 배를 채우고 롯지를 떠나 응고롱고로 국립공원으로 출발. 창밖으로는 소를 모는 아이들과 학교에 가는 아이들이 보였다. 비로ㅕㄴ 인해 진흙탕이 돼버린 길에 미끄러져있는 투어 차량도 많았다. 이곳은 견인차가 올 수 있는 지역이 아니라서 이렇게 차가 도랑에 빠져 버리면 여행사가 새 차를 보내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단다. 다행히 우리 차는 큰 문제없이 국립공원까지 잘 달려주었다.
세계 최대의 칼데라, 응고롱고로 분화구
둘레 326km, 제주도 면적의 8배 크기인 이곳에 지구상의 온갖 동식물이 살고 있다
응고롱고로 분화구에 도착해 처음 만난 동물은 누와 얼룩말. 요 며칠 동안 참 많이 봤지만 이렇게 가까이에서 본 건 처음이다.
갓 잡은 먹이를 입에 물고 가는 사자를 보니 섬뜩하다.
혹멧돼지 품바. 참고로 미어캣(티몬)은 탄자니아에 살지 않는다.
귀여운 여우는 어디로 가는 중일까?
타조와 북소리를 내는 새, 하이에나, 가젤, 코끼리.. 말도 안 되게 다양한 동물들이 자유롭게 한 공간을 누비고 있다. 육식동물과 초식동물이 어찌나 가까이에 있는지,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 생길까 긴장하고 있던 나와 달리 동물들은 평화로워 보이기만 했다.
유유히 공원을 누비던 중 대니스가 차를 세우고 들뜬 목소리로 창밖을 보라고 말했다. 그가 가리킨 쪽을 보니 대여섯 마리의 누가 있었는데 '뭘 보라는 거지?' 싶었다. 대니스는 갸우뚱한 우리의 표정을 읽었는지 '한 마리가 곧 새끼를 낳을 거야'라고 알려주었다. 자세히 보니 꼬리 뒤쪽으로 노란색 주머니가 달려있는 누가 보였다. 우리는 조용히 어미 누를 지켜보기 시작했다. 힘을 줬다 뺐다를 반복하며 이따금씩 땅에 누워 한참동안 숨을 고르며 쉬었다. 과정이 너무 길다 보니 함께 지켜보던 다른 관광객들은 먼저 자리를 뜨기도 했다.
대니스도 이 누의 출산이 유독 오래 걸리는 편이라고 했다. 게다가 나는 어느 순간부터 무리에서 멀찍이 떨어져 나와있는 어미 누가 버림받은 것인지 걱정되어 대니스에게 상황을 물었는데, 다행히 그건 아니고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육식동물들은 잘 걷지 못하는 갓태어난 동물을 먹잇감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고로 출산 중인 동물, 갓 태어난 새끼 가까이에 있으면 먹잇감으로 노출될 위험이 높아지기 때문에 멀리 떨어져 있는다고 한다.
목숨을 건 채, 모든 기력을 쏟고 있는 어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거의 30여분간 나올 기미도 안보이던 새끼의 모습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힘, 힘주세요! 조금만 더!' 아마 지켜보던 이들 모두 한 마음으로 응원했을 것이다. 10분 정도가 더 흘렀을까, 마침내 새끼 누가 탄생했다. 새끼 누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이리저리 움직여보며 금세 서는 법을 익혔다. 멀리 떨어져 있던 다른 누들도 갓태어난 새끼와 힘을 다 써버린 어미를 보호하려는 듯 가까이 왔다. 어미 누는 허기가 졌는지 새끼에게 젖을 먹이며 풀을 뜯어 먹었다.
아프리카에 와서 동물의 출산 장면을 목격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었는데. 세렝게티에서 육식동물이 사냥하는 모습을 보지 못해 아쉬워하던 남편도 더 대단한 걸 봤다면서 좋아했다. 대니스도 동물의 출산 장면을 보는 게 사냥 장면을 보는 것보다 어렵다면서 우리가 운이 좋은 사람들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 정도 운이면 그 보기 어렵다는 코뿔소까지도 볼 수 있을거라고!
사실 여행을 오기 전까지만 해도 빅 5(사자, 코끼리, 버팔로, 표범, 코뿔소)를 다 보고야 말겠다는 목표 같은 건 없었다. 워낙 어렵다고들 하니까. 그러나 예상과 다르게 벌써 빅5 중 네 마리의 동물을 봐버린 우리. 이쯤 되니 기왕이면 코뿔소까지 보고 싶다는 마음이 스멀스멀 자라나고 있던 터였다. 다만 코뿔소는 멸종 위기종으로 탄자니아 내에도 개체 수가 상당히 적기 때문에 매우 보기 어려운 동물이라는 게 함정. '오늘 과연 코뿔소를 볼 수 있을까?' 하는 설렘을 안은 채 투어는 계속되었다.
이날은 유독 하이에나를 많이 봤다. 참 정이 안 가게 생긴.. 동물..
탄자니아에 엄청난 종류와 개체수의 조류가 산다고 하는데 여행을 하다 보면 생전 처음 보는 새가 참 많다. 대니스가 지금까지 진행한 투어 중 가장 길었던 게 약 한 달간 유럽의 조류 동호회 사람들을 가이드했던 일이라고 하는데 한 달 내내 새만 보러 다니는데도 매일매일이 새로웠단다. 워낙 새가 많아서인지 다른 동물보다도 새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유독 사파리를 재밌어한다고도 했다.
우리는 저녁 6시까지 킬리만자로 공항에 도착해 잔지바르행 비행기를 탑승해야 했기 때문에 이날 유독 바쁘게 움직였다. 굵고 짧게 응고롱고로 분화구를 잘 둘러보고자 점심도 제때 먹지 않았다. 점심은 공원을 다 둘러보고 나가는 길에 먹기로 하고 잠시 쉬는 시간을 가지기 위해 아주 작은 공터에 들렀다. 대니스는 이곳에 화장실이 있으니 쓰고 가라고 하는데, 나는 내심 걱정이 되었다. 이 허허벌판에.. 아무것도 없는 오지에 있는 화장실이 과연 깨끗할까? 갑자기 만리장성에 갔을 때가 생각났다. 화장실 입구에서 열 걸음은 더 떨어져 있는데도 느껴지던 악취.. 과연 이곳은 다를까.. 20대 후반의 나이에 바지에 볼 일을 볼 수는 없으므로 결연한 태도로 화장실에 향했다. 예상과는 다르게 화장실이 너무 깨끗해서 놀랐다. 심지어 서울의 웬만한 지하철 화장실보다도 깨끗했다. 칸에 들어가기 전에 바닥을 한 번 더 닦아주는 청소부도 있다. 대니스에게 물어보니 국립공원에는 관광객이 많아서 대부분의 화장실에 청소부가 상주하여 깨끗하게 관리를 한다고 했다.
'라이노!'
대니스가 소리쳤다. 코뿔소가 있다는 것이다! 맨눈으로는 회색 점처럼 보이는 것을 망원경으로 확대해보니 그제서야 코뿔소의 형태라는 감이 온다. 드디어 빅 5를 다 봤구나. 진짜로 봤다고 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멀리 있었지만 뿌듯했다. (카메라로는 도저히 보이지가 않아 사진도 안찍었다.) 코뿔소가 얼마나 희귀한 동물이냐 하면 이 얘기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응고롱고로 분화구 내에는 차량이 다닐 수 있도록 흙길이 만들어져 있는데 투어 차량은 이 길을 따라서만 움직일 수 있다. 이 길을 벗어나는 게 금지되어있다. 그런데 딱 한 가지, 투어 차량이 이 길을 벗어날 수 있는 조건이 있다. 그건 바로 육식동물이 코뿔소를 공격 중이거나, 공격하려는 모습을 봤을 때. 코뿔소는 인간이 개입해서라도 보호해야 할 멸종 위기종이기 때문에 그런 상황을 본다면 차량을 이용해 육식 동물에게 겁을 줘 쫓아내야 한다고 한다.
코뿔소까지 봤겠다 슬슬 투어를 마무리하며 달리는 와중에 '라이노!'하고 대니스가 또 소리친다. 이번에도 콩같이 작게 보이긴 하나 아까보다는 가까웠다. 육안으로도 코뿔소의 형태라는 게 보였으니까. 게다가 이번에는 두 마리. 그 보기 어렵다는 코뿔소를 세 마리나 봤다. 수지맞은 하루였다.
즐겁게 투어를 마치고 공항으로 가는 길. 나흘간 궂은 날씨에도 무탈하게 잘 달려주던 우리 차에 문제가 생겼다. 사파리 가이드는 수준급 차량 정비사이기도 해서 문제의 원인은 금방 찾았지만 필요한 부품을 구할 수 없는 게 문제였다. 우선은 길에 차를 세워놓고 대니스가 여행사에 연락해 해결방안을 찾아보기로 했다. 대니스가 통화를 위해 차에서 내려 멀찍이 떨어져 있는 사이, 나와 남편은 뒷좌석에 앉아 과자를 오물오물 먹고 있었는데 지나가는 사람들이 큰 문제가 생긴 줄 알고 다들 멈춰 괜찮냐고 물었다. 처음 보는 사이임에도 서로의 안부를 묻고 행운을 빌어주는 곳. 사파리는 정이 넘친다.
다행히 우리 차엔 조금 더 달릴 힘이 남아있었다. 여행사에서 자신들이 지정해준 장소까지만 오면 바로 부품을 받아볼 수 있게 준비해놓겠다는 연락을 줬다. 그렇게 약속된 장소까지 달려 부품을 교체하고 기념품 가게에 들렸다. 가게 옆에 마련된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기념품도 샀다. 이때 남편의 흥정 실력에 감탄했다. 직원이 100달러를 부른 조각상 세트에 10달러를 역 제안한다. 아무리 탄자니아 기념품 가게가 바가지로 유명하다지만 10분의 1 가격을 요구하다니 '이건 양아치 아니야?'라고 생각한 나. 그렇게 둘이 몇 번 실랑이를 하더니 결국 남편은 30달러에 자석 두 개까지 얹어주는 딜을 만들어냈다. 이곳의 물가를 생각하면 사실 30달러도 비싸게 준 편이기는 하지만 여행자로서 너무 인색하게 굴 필요는 또 없으니까. 대니스도 관광객이 그 정도 흥정했으면 아주 잘한 거라고 한다.
첫날과 똑같은 길을 반대로 달리며 여행을 곱씹다 보니 금세 공항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기 전 우리가 사놓고 뜯지도 못한 간식이 많아서 쇼핑백에 담아 뒷좌석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대니스가 투어 중 배가 고플 때 꺼내 먹을 수 있도록. 마지막으로 대니스와 인사를 나누는데 벌써 정이 많이 들어서 코끝이 찡했다. 탄자니아가 물리적으로 너무 먼 나라이다 보니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더 아쉽고.. 우리는 탄자니아에 또 온다면 꼭 대니스를 다시 찾겠다고 말했다. 대니스도 미국에 가게 된다면 우리를 꼭 부르겠다고! 앞으로도 연락을 주고받기로 하고 왓츠앱과 이메일 주소를 교환했다. 가이드 팁까지 주고 나니 투어가 정말로 끝이 났다. 셋이 함께 사진을 한 장 찍고 우리는 헤어졌다.
※가이드 팁은 1인당 하루 10~20달러를 내는 게 보통이다. 2인으로 4일간 투어를 진행했다면 80~160달러를 내면 되는 셈.
작은 공항이지만 우리와 같은 비행기를 타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이때 코로나 문제가 조금씩 심각해지고 있던 시기라 나와 남편은 마스크를 꼈는데, 우리 빼고는 아무도 마스크를 하고 있지 않았다. 게다가 비행기까지 한 시간 지연되면서 그 작은 공간에 수십 명의 사람이 다닥다닥 붙어 앉아 있어야 했다.
비행기로 한 시간. 잔지바르에 도착한 우리는 짐을 찾고 곧장 밖으로 나가 예약해 둔 택시기사를 찾았다. 머리가 새하얀 남성이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준다. 스톤타운에 있는 숙소를 향해 출발. 이렇게 잔지바르 일정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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